2020. 5. 26. 18:10ㆍ자작시, 주제없는 글
#scene 1
때는 2020년 5월 20일 날이 길어지는 게 슬슬 느껴져 저녁 8시경에도 어스름한 빛바랜 파란 물을 고개 들어 볼 수 있는 시기였다. 지하철을 내려 역사를 걷다 보면 놓여있는 몇 개의 벤치가 그날따라 눈에 들어온 것은 왠지 오래 앉아 있었음이 느껴지는 한 소년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그 소년은 눈시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으나 그것이 눈병이 아니라 설움에 찬 눈물을 애써 참으려 하기 때문임은 그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슬프고 화가 나면 핏기가 차오르는 것은 예삿일이지만 그런 감정 만으로 그 소년만큼 달아오르려면 안구가 남아 있을까 싶다. 그렇게까지 힘겹게 눈물을 참고 있으나 그 표정을 보기 전까지는 그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지 못할 만큼 어찌나 그 자세가 올곧았는지, 뒷모습을 보았다면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을 것이다. 소년의 눈에는 물이 아직 많이 고여 있었으나 눈물을 단 한 번도 훔치지 않았는지 손은 단정하였으며 볼에는 눈물 자국이 있으나 이미 오래전에 말라 있었다.
소년이 앉아있던 곳은 벤치가 나란히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 소년의 존재감 때문인지 다른 벤치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때때로 지나가던 어른들이 왜 그러고 있냐고 묻고 미동 없는 소년을 바라보며 짧은 위로의 말을 건네며 급히 혹은 망설이며 자리를 옮겼다. 그러던 중 자세에서는 연륜이 느껴지지만 얼굴은 앳돼 보이는 청년의 어느 즈음에 속하는 사람이 옆 벤치에 조용히 앉았다.
“저는 혼잣말을 즐기기에 너무 개의치 말아 주길 바랍니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얘기가 당신에게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제 넋두리이지만 귀에 들려 거슬리면 주의를 주세요. 불편하면 제가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고 그 사람은 소년이 미동하지 않는 걸 인지한 후에 얘기를 이어 나갔다.
“저는 참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 제가 울기 시작하면 누가 보아도 우는지 아는데, 참 부럽습니다. 저는 슬퍼서도 울고 기뻐서도 울고 누군가 희생할 때에도 울고, 누군가의 불의가 묵인될 때에도 억울해서도 울고 참으로 자주 눈물을 흘렸어요. 그리고 좀 특이할 정도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동조가 잘 되어서 누군가의 감정이 이해가 되면 눈물이 잘 나는 편이에요. 그런데 학생의 모습을 지나가다 보니 눈물이 나지는 않는데 가슴이 뜨거워져서 잠시 앉아서 생각 정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방금 전의 그 말을 매우 점잖은 목소리로 한 문장마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얘기를 풀어 나갔다.
“방금 얘기한 특징 때문에 저는 불의를 어릴 때부터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철이 없던 학생 시절에는 모범생처럼 살았음에도 학생부에는 자주 드나들어야 했고, 주변 사람들과 수없이 다투고 학교 제도가 맘에 들지 않을 때에는 보충수업 시간에 운동장에 책상을 두고서 공부를 하는 식으로 시위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 성격이다 보니 좋은 의도로 행동한 행동들도 선을 넘어서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여기까지 얘기를 하자 미동 없던 학생의 고개가 그 사람 쪽으로 아주 미약하게나마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도 그걸 인지하였는지 처음보다는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살수록 제가 사회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게 너무 미약하다는 것을 느끼고 갑갑한 감정이 속에 쌓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두었어요. 그만두고서 젊을 때 남들과 다투는데 시간을 쏟지 않고 제 자신을 더욱 갈고닦는데 시간을 쏟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 생각이 되면 그때 다시 부딪혀가며 살아가겠다 매일 다짐을 하면서요.”
거기까지 말한 그 사람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는지 혹은 주변에 소음이 들어차는걸 인식해서인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 손을 깍지 끼고서 머리 위에 얹고 다음 지하철이 들어오는 것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때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세를 유지하던 소년이 일어나 상기된 얼굴로 밝게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그 청년을 향해 허리를 재빨리 굽혔다 펴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아무런 얘기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문이 열리고 있는 지하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소년이 사라지고 난 자리의 벤치를 돌아보니 아까의 청년도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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