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의 마음

2020. 6. 16. 23:47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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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山之石(타산지석) : 하찮은 남의 언행일지라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

만난 사람 모두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현명하다. _탈무드

 

 현명한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언제나 많은 것을 느끼고 알 수 있는 사람일까. 너무 의도적인 질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많은 것을 알아서 지금의 수십가지 선택에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지금 선택을 고민하지만 그 결과로 수십가지의 선택을 깨닫게 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현명한 사람인가? 이 정도면 어느정도 균형이 맞아 고민이 되는 질문이다. 여기서 내 개인적인 대답은 전자의 사람은 현명하게 살아와서 앞으로 같은 자세라면 계속 현명할 사람이며, 후자의 사람은 당장 현명한 사람이다. 그럼 둘다 현명한 사람인가? 방금전의 내 얘기가 다소 어렵지만 그 의미가 아니다. 현명함은 지금 선택을 잘하는 것으로 판가름 되는게 아니라 모든 행동과 사건에 어떠한 자세로 임하는지로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서란 '받아들임'이며 충이란 '진심으로 전념하는 상태' 이다

 나는 어릴때 여러 병법서들과 논어를 참 좋아했는데 그런책들은 당시에 한자가 절반 한글이 절반이었다. 한자는 잘 못외워서 뜻풀이를 하고자 옥편을 같이 끼고 다녔다. 물론 한문이 어려워 그 내용 중 극히 일부만 머리에 담고 있지만, 군 복무 시절에도 인트라넷에서 논어 해설본을 구해서 읽곤하였다. 사족인 내용이지만 공군 인트라넷으로 아주 깊은 곳까지 살피다 보면 고문서 사본과 고전 문학 자료들이 꽤 있었는데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다. 당시에 읽었던 내용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공자가 제자의 질문에 자신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알아서 그것으로 다른것을 관철시킬 뿐이라는 대답을 한 부분이다. 당시에는 그것이 누구나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의 가치관 이거나 이념 같은 것으로 생각되어졌는데 살면서 계속 생각해보니 그런 얘기가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실 공자는 자신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은 한가지만을 안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현학에 대한 질문의 대답은 당연히 배움의 자세이며, 모든 배움의 순간에 진심으로 임하는 자세이다. 그것은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다른 가치관으로 대체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삶에 임하는 자세 자체이다.

 우리는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잘못을 보고 남몰래 비웃으면서 자신도 어느새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을때가 많다. 그런데 반면에 남들의 성공은 또 가벼이 여기어 어떻게 성공했는지 분석하지 못하고 적당한 노력으로 따라해보려 할 때도 많다. 혹은 그런 노력이 싫어 그저 동경의 대상으로 삼고 대단한 사람이네 하고 말아버린다. 만약에 당신이 그리고 내가 공자가 말한 하나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그런 순간에 다른 사람의 실패가 경험이 되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의 성공은 새로운 견해를 열어 줬을 것이며, 동경의 대상에게서 그의 삶의 방식 중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말한 배움의 자세는 우리의 본성과 매우 멀다. 잘못은 쉽게 잊는게 정신 건강에 좋고 남의 실패를 분석해서 자신의 경험을 보완하는 작업은 더욱 스트레스를 미리 가져온다. 적당한 노력이 아닌 진심을 다했을 때의 성과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과시할 내용이 못 된다. 동경의 대상을 그대로 두지 않고 자신의 능력에 흡수 시키는 과정은 굉장한 인내와 고난이 따른다. 다수의 사람들은 좀 더 편한 방식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길 원하고 자신의 운에 기댄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점은 현명한 사람은 앞서 말한 내용들을 이미 실천하고 있을 것이며, 그들은 동경의 대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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