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있는 그대로 흘러간다. 테트레이션에 기반하여 전개한 생각.

2024. 10. 27. 15:59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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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현 시점의 내 철학에 근간이 되고 있는 확률론적 결정론과 개인의 의지의 가치에 대해서 얘기할 것이다. 바로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최근에 다소 가볍게 쓰던 글 대신에 진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다시 쓰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그 마음가짐을 담은 첫 글로 최근에 내가 생각하는 중심적인 철학을 기반으로 글을 써보려한다. 다만, 특이하게 수학적 지식을 곁들여서 논리를 전개할거라는 것을 미리 알린다. 요새 여러가지 지식에 대해 새롭게 공부를 많이 한 후 내 철학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는 5년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선택하는 삶과 그 선택의 이유를 고민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누구나 인지하고 있으나 애써 의식하면서 살아가지 않는 것은 세상은 의지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 화창한지 비가오는지 그런 것들은 자연이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결정되는게 아니다. 세상 자체는 아무런 의지가 없이 그저 존재하고 흘러가는 것이지만 지성이 있는 생물체인 인간은 의지가 없는 행위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세상이 의지를 가졌다고 생각하면서 수쳔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토속신앙부터 시작되어 현대에 있는 다양한 종교들에 대한 믿음이 인간 사회에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종교가 없더라도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지성적으로 세상이 어쩌면 의지가 없을거라 인지하였지만 인간들의 의지로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존재들이 나타났고 그들이 과학을 발전시켜 실제로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거시적으로는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더 미시적으로 접근을 시도한 끝에 얻게 된 결론은 세상은 지성체가 바랬던 것처럼 결정론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았고, 반대로 의지가 있어서 자연이 자비를 베풀길 바라고 있을 수도 없었다. 더욱이 지성체들이 스스로 생각한 것과 달리 현대의 뇌과학은 생물체의 의지는 오히려 거시적인 현상이라 결정론적인 것이라 밝혀지고 있는 탓에, 자신의 의지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의구심이 들기도한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자면, 세상은 의지가 없고 인간과 인간사회는 의지가 있으니 개인의 노력을 너무 얕잡아 볼 필요도 없으며, 반대로 개인이나 사회의 의지 그 자체가 이 세상이 흘러가는 실제 이치와는 동떨어진 것이니 너무 의식하면서 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현재 벌어지는 모든 현상이 결국 의지가 없는 세상에서의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미래에 벌어질 현상들에 대해서 자신의 의지로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면 될 것이다. 이러한 철학을 뒷받침할 근거로 수학 연산 개념 중 하나인 테트레이션에 대해 설명하면서 글을 이어가겠다.

 

 

 지수가 곱셈을 연달아 하는 것이라면 테트레이션은 지수 연산을 연달아 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테트레이션은 이공계에서도 수학이나 물리학과가 아니라면 이런걸 정의하고 있는지도 모를만큼 생소한 수학적 정의이지만 매우 명료한 수학적 개념이다. 지수와 달리 보편적으로 공부하지 않는 이유는 1 이상의 자연수나 실수에선 아주 조금의 테트레이션 연산만으로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숫자의 크기를 넘어서고 그 크기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적으로 다루는 물리학적 연산에서의 원자의 수 조차도 지수표기법으로 표현이 가능한 수준이기에 현대의 학문에서도 실용성이 매우 낮다. 테트레이션의 개념이 생소하지 않다면 수학에서 학문적으로 매우 깊게 공부한 사람이거나 나처럼 다양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배우길 좋아하는 호학심이 강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된다. 여하튼 테트레이션을 허수에서 실행하면 3중나선이나 삼각형 형태로 수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게 매우 희한하다. 아래는 공학용 계산기로 약산 계산으로 설정하고 100i의 테트레이션을 실행한 결과인데, 100i를 세번 테트레이션하면 100i에 다시 근접해 지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약산 계산이 아니라 정밀 계산을 진행해 컴퓨터로 그래프를 그려보면 100i에서 미묘하게 떨어진 한점을 포함한 세점을 향해 삼각형을 형성하며 수렴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초기값과 달리 분명하게 어떠한 점을 향해 수렴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1의 곱셈계산과 같이 초기값의 크기를 유지하지 않고 다양한 수렴점을 가진다는 것에서 매우 희한하다.

 

 2차원 복수평면에서 나타낼 수 있는 어떤 값이 자기 자신만을 활용하는 단순한 계산식을 무한히 진행하면 3개의 가능성을 가지는 확률론적 위상으로 수렴점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런 특이한 수렴성이 아주 간단한 연산에서 발생한다는 의미는 매우 큰 가능성을 암시한다. 가령 우리는 -1을 곱하면 서로 온전히 대칭되는 1차원적 물리량이 고정 된다는 것을 통해 쌍극자처럼 -1을 곱해 서로대칭되는 값에서 쌍을 이루며 물리량이 간섭하는 현상이 자연 현상에서 다수 발생 가능하다는 것을 유추 할 수 있엇다. 직관적인 자연현상과 위배되어 아인슈타인이 유령같은 원격작용( spooky action at a distance!)이라면서 조롱한 양자얽힘 역시 이러한 수학적 성질에 의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양자역학이 실험적으로 어느정도 증명되기 전까지는 과학계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수학적으로 유추되며 현재까지의 관측 결과 양자역학이 옳기에 필연적으로 존재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테트레이션의 3중 수렴성의 의미는 서로 전혀 관계 없어보이는 세개의 물성치가 거시적 공간에서 서로 관계되면서 작용할 가능성을 의미하기도하며 더 나아가서 어떤 입자가 3개의 물리량을 확률론적으로 가지는 자연현상이 실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향성을 생각하면 1차원적 물리량에서 두개의 점이 쌍을 이루고 2차원적 물리량에서 3개의 점에서 쌍을 이룬다면 3차원, 4차원 혹은 그 이상의 차원에선 n+1의 가능성이 서로 쌍을 이루면서 물리량을 결정하고 있을 수 있다는 철학적 가설을 진행할 수도 있다.

 뇌과학의 발전 이후로 어떤 행위의 가능성에 대한 결정론적인 시각이 생물학계에서 다수의 의견으로 발달한 것과 달리, 물리학에선 고전역학 당시 결정론적 사고로 수렴되었던 인식이 양자역학의 발견 이후 확률론적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미시적 관점에서 확률론적으로 결정된 현상이 거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맞다고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에 우리가 결정적이라 생각했던 현상들도 미시적으로는 분명 확률적으로 결정되는 과정이 작용할 것이라 생각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테트레이션의 연산이 보여주는 현상은 이런 확률론적 결정론에 더 힘을 실어준다.

 즉, 무언가의 생물학적 의지가 이미 결정된 것이고 생명체의 어떤 의지가 세상을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과학적인 생각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더 낮은 단계에서 부터 세상은 확률적으로 결정되고 있다. 현재로서 경험되기 이전까지는 미래의 상황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어쩌면 우리가 행하고 있는 어떤 행위들로 인한 변화와 그와 간섭되는 어떤 물리량의 변화가 다시 우리와 관련된 미래에 확률적 간섭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비록 나의 지금 의지가 온전히 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변의 누적된 정보에 의한 결정론적 사고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미래의 확률을 건드는 사소한 모든 사건들 중 내가 관여하고 있는 행위가 내 의지라고 생각한다면 의지는 개념적으로 존재한다. 즉 세상의 관점에서 의지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확률론적 결정론에 따라 움직일테지만, 미래의 현상이 확률적으로 일어난다면, 개인이 행동하는 행위가 미래의 확률에 관여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생명체의 의지는 실존한다. 그러나 세상 자체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어떠한 개인이나 사회의 의지가 가지는 가치는 세상의 입장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행동이 옳고 나쁘고 선하고 악하고는 그 생명이 사는 사회의 의지가 결정한 것이지 세상이 결정하고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인정받을 사람인지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개인이 스스로 온전히 만족할 수 있는 방향에서 선택을 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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